국외작가 및 작품 이야기/선을 넘는 그림, 그림 너머의 피카소

선을 넘는 그림, 그림 너머의 피카소(6) - <세 명의 음악가> 입체의 끝에서 삶을 노래하다

은달84 2025. 5. 8.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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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 그림, 그림 너머의 피카소 (6)

<세 명의 음악가> - 입체의 끝에서 삶을 노래하다


1. 정체불명의 인물들, 낯익은 조화

처음 〈세 명의 음악가〉를 보면, 색은 분명 밝고 경쾌하지만, 형체는 알아보기 힘들다.
사람이 맞는가? 얼굴은 왜 이렇게 평면적인가?
나란히 앉은 세 명의 인물은 악기를 연주하고 있지만,

그 자세나 구조는 너무나 기이하다.

게다가 이 그림엔 두 가지 버전이 존재한다.
배경도, 색채도, 악기와 손의 위치도 미묘하게 다르다.
피카소는 1921년, 똑같은 제목으로 이 두 그림을 그려냈다.

이 시기는 흔히 말하는 ‘합성 입체주의’의 절정기였다.
앞선 ‘분석적 입체주의’에서 형태를 해체하고 파편화했다면,
이제는 다양한 색과 소재를 조합해 ‘조립하듯’ 새로운 이미지를 구성했다.

마치 콜라주처럼, 현실의 파편들을 붙여서 하나의 조화를 만들어내는 회화.
〈세 명의 음악가〉는 그 집대성이다.

파블로 피카소 <세명의 음악가>

 

파블로 피카소 <세명의 음악가>


2. 음악가 셋, 그리고 피카소의 추억

이 그림의 세 인물은 형상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왼쪽은 피에로, 가운데는 아를르캥, 오른쪽은 수도사로 보인다.

가장 널리 알려진 해석은 다음과 같다.
피에로는 피카소 자신,
아를르캥은 피카소의 절친이자 요절한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
수도사는 막 친구가 된 막스 자코브를 의미한다.

이 세 인물은 단지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게 아니라,
피카소가 지나온 예술과 우정, 상실과 추억을 입체적으로 조합한 결과다.

그림 속엔 개가 테이블 밑에서 조용히 웅크리고 있고,
화면을 꽉 채운 색면들과 음악보는 구조적으로 어지러우면서도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입체는 해체의 끝이 아니라,
삶을 조립하고 추억을 재구성하는 예술이었다.


3. 색과 선, 그리고 소리의 환상

이 그림에서 특별히 눈여겨볼 점은 소리 없는 소리감이다.
악기, 음표, 연주하는 손짓이 시각적으로 표현되었지만,
그림을 보는 우리는 마치 음악을 듣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피카소는 형태의 해체만이 아니라,
감각의 해체와 전이도 실험하고 있었다.
그림으로 음악을 연주하고, 색으로 감정을 만들어내는 작업.

그는 조형을 넘어서, 감각을 ‘연결’하는 예술가였다.


4. 입체의 끝, 그러나 더 자유로운

〈세 명의 음악가〉는 입체주의의 끝자락에서 등장한 작품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것은 끝이 아니라 ‘자유’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그는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만들어가고 있었다.
과거의 친구들을, 자신이 지나온 시절을,
조각난 삶의 파편을 조화롭게 붙여가면서.

두 버전의 그림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같은 주제를 반복하며, 다르게 구성해내는 것.
그건 어쩌면 피카소가 ‘삶’을 대하는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마무리 – 형체는 사라졌지만, 이야기는 남는다

〈세 명의 음악가〉는 더 이상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 가장 인간적인 감정과 추억을 발견한다.

입체의 끝, 해체의 끝에서,
그는 다시 사람을 그리고 있었다.
기억과 사랑, 우정과 예술을.

그리고 그 안에서,
피카소는 가장 자유로운 예술가가 되었다.

 

→ 선을 넘는 그림, 그림 너머의 피카소(7) 예고   

→ <게르니카> 그림으로 쏘아올린 검은 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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