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작가 및 작품 이야기

천경자의 여행 – 떠남, 그리고 다시 피는 얼굴들

은달84 2025. 4. 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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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의 여행 – 떠남, 그리고 다시 피는 얼굴들

봄이 오니까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진다. 따뜻한 햇살이 어깨에 내려앉고, 바람이 마음속 먼지를 털어주는 것만 같아서. 그런 날이면 문득 천경자 화가가 떠오른다. 그녀의 그림은 어디선가 막 돌아온 얼굴들이거나, 지금 막 떠나려는 눈빛 같다.

천경자는 삶의 많은 시간을 여행하며 보냈다.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인도, 중남미, 유럽... 그녀는 낯선 땅을 걷고, 그곳의 빛과 사람과 냄새를 화폭에 담았다. 하지만 그 여행은 단순한 풍경 수집이 아니었다. 그녀는 타인의 얼굴에서 자신의 마음을 발견했고, 낯선 땅에서 자신의 외로움을 확인했다.


1. 왜 그녀는 그렇게 자주 떠났을까?

천경자는 여행을 일상처럼 했다. 이혼 후, 아이들을 다 키워놓은 후, 그리고 그 무엇에도 속하지 않는 삶을 선택한 이후에. 그녀의 여행은 도피도 아니었고, 방랑도 아니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되찾는 방식이었다.

"그림이 내 생명선이듯, 여행은 내 숨구멍이었다."

 

그녀에게 떠난다는 건 세상을 보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낯선 곳에서 만난 여인의 눈동자, 시장의 붉은 천, 정오의 바람결... 모든 것이 그녀의 감정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2. 이국의 여인들, 나를 닮은 얼굴들

천경자 <그라나다 두 자매>

 

천경자의 그림 속에는 이국의 여인들이 자주 등장한다. 인도네시아 여성, 아프리카 소녀, 스페인 여인... 다 다른 모습이고, 다른 배경이지만 하나같이 고요하고, 슬프고, 강하다.

그녀는 타인을 관찰하는 화가가 아니었다. 그녀는 타인의 얼굴을 빌려 자신의 마음을 그리는 사람이었다.

"여자는 어디서나 여자로 살아간다."

 

그녀는 타국의 여인 속에서 자신의 고독과 자존을 확인했고,
그림으로 그 순간을 영원히 붙잡았다.


3. 여행, 그 붓의 색을 바꾸다

천경자의 그림이 유난히 화려한 이유는, 그녀가 수많은 색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붉은 황토, 라틴아메리카의 원색들...

그녀의 붓은 현지의 빛을 품고 있었고, 그 빛은 감정의 색으로 변주되어 그녀의 그림에 스며들었다.

그 색은 실제의 색이 아니라, 그녀가 느낀 마음의 기후였다.

천경자 <탱고를 찾아서>


4. 천경자의 여행이 특별한 이유

그녀의 여행은 화려하거나 자유롭기만 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쓸쓸하고 조용한 움직임이었다.
혼자 떠난 길 위에서, 조용히 걸으며, 가만히 바라보며… 그녀는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떠났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떠난 게 아니라, 떠나야만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사람.

그녀의 여행이 남긴 것은 수많은 여인의 얼굴이었고, 그 얼굴들 속에는 천경자의 초상화가 천 개쯤 숨어 있었다.

 

천경자 <자마이카의 여인 곡예사>


5. 마무리 – 떠나고 싶은 이 계절에

따뜻한 봄이 오고, 마음이 어디론가 향하는 지금.
천경자의 그림을 들여다보면, 그녀의 여행이 단지 발의 움직임이 아니라 마음의 항해였다는 걸 알게 된다.

타인을 그려 자신을 이해했던 화가,
낯선 곳에서 익숙한 감정을 찾았던 사람,
떠남을 통해 스스로를 지켜낸 여성.

 

천경자의 그림 앞에서 잠시 멈춰 생각해본다.
어디로 떠나고 싶은지보다, 무엇을 찾고 싶은지를.

그녀처럼, 나도 나를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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