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나르시스트 - 천경자
영원한 나르시스트 - 천경자
천경자(1924~2015). 그녀의 이름을 들으면 먼저 떠오르는 건 화려한 색채, 이국적인 여인들, 그리고 커다란 눈망울이다. 하지만 그 찬란한 색 뒤에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슬픔과 외로움이 숨어 있다. 그녀는 슬픔을 외면하지 않았고, 그 슬픔을 꽃과 여인의 얼굴에 새겨 넣었다.
0.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만난 천경자
천경자의 작품은 재작년, 서울시립미술관에 에드워드 호퍼의 전시를 보러 갔다가
상설전시를 추가로 관람하면서 만나게 되었다.
예전부터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상시로 천경자 화백의 작품을 전시했던것 같은데,
항상 메인전시만 보고 천경자 화백의 작품을 눈여겨보지 않았었다.
아무튼, 천경자의 작품을 처음 봤을 때 그 눈빛에 담긴 감정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화려한 색채 뒤에 슬픔이 있고, 조용한 얼굴 안에 거대한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처음 느낀 순간이었다.
1. 여인을 그리다, 나를 그리다
천경자의 그림에는 늘 여성이 중심에 있다. 그 여성은 곱게 단장했지만 슬픈 눈을 하고 있다. 멀리 바라보거나, 살짝 미소를 머금고 있지만 어딘가 쓸쓸하다.
"나는 여인을 그리면서 나 자신을 그리고 있다."
그녀는 자화상을 자주 그리지 않았지만, 사실 그녀가 그린 모든 여인은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사랑받고 싶고, 사랑하면서 상처받고, 그럼에도 여전히 사랑을 품고 있는 존재들.
2. 색채의 화가 – 슬픔을 입히다
천경자의 그림은 색이 아름답다. 선명하고 대담하고, 때론 눈부시게 화려하다. 하지만 그 색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그녀는 슬픔을 색으로 입혔다.
짙은 보라색은 외로움을,
붉은색은 그리움을,
금빛은 희망을 상징했다.
그녀의 대표작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에서도 화려한 색 위에 깊은 고독이 흐른다.
화면을 가득 채운 여인의 얼굴은 고요하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다.
3. 여행, 그리고 이국의 여인들
천경자는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그림을 그렸다.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중남미... 그곳에서 만난 여인들은 그녀의 화폭에 이국적인 아름다움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그 여인들은 단지 낯선 존재가 아니다. 이국의 여인들 속에도 그녀는 자신을 투영했다. 낯선 땅에서 살아가는 여성, 사랑을 기다리는 여성, 운명을 감내하는 여성.
"나는 낯선 얼굴에서 나를 본다. 여자는 어디서나 여자로 살아간다."
4. 그림으로 버텨낸 삶
천경자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다. 이혼, 사랑하는 딸의 죽음, 오랜 고독...
그녀는 그림으로 슬픔을 견뎠고, 그림으로 살아남았다.
"그림은 나의 생명선이다. 나는 그림 없이는 살 수 없다."
말보다 먼저 눈이 가는 그녀의 그림. 말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얼굴들.
그림 속 여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우리는 느낀다.
그 슬픔의 결이 얼마나 깊고, 그 고요함이 얼마나 강한지를.
5. 천경자가 남긴 것
천경자는 우리에게 많은 그림을 남겼다. 그리고 그 그림 속에는 한 여성의 생애와 감정, 시대와 기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녀는 자신을 숨기지 않았다. 대신 색으로 표현했다.
그녀는 말하지 않았다. 대신 눈빛을 남겼다.
그녀는 슬펐지만, 그 슬픔을 가장 아름답게 그렸다.
그래서 우리는 천경자의 그림 앞에서 멈춰 선다.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마음을 듣는 일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영원한 나르시스트.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았던 사람.
천경자의 그림은 그렇게,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