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외작가 및 작품 이야기/흙 위의 기도, 밀레와 땅의 사람들

흙 위의 기도, 밀레와 땅의 사람들(7) - <건초 묶는 사람들> 덧없음 위에 내려앉은 축복

은달84 2025. 6. 9.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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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 위의 기도, 밀레와 땅의 사람들(7) - <건초 묶는 사람들> 덧없음 위에 내려앉은 축복

 

덧없음의 계절을 지나며

건초는 금세 말라버리는 풀이다.
여름의 끝에 부지런히 베어내고, 쌓고, 묶어두지 않으면 이내 썩어버린다.
르네상스 시절엔 그것이 신의 선물이었다고 한다.
만인을 위한 축복, 땅의 결실을 상징하는 선물.

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건초는 더 이상 축복만은 아니게 되었다.
덧없이 사라지는 물질의 상징.
육체와 생명이 지닌 유한함,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장 프랑수아 밀레의 《건초 묶는 사람들》은
그런 상징 위에, 더 깊은 인간의 현실을 올려놓는다.

 

밀레 <건초 묶는 사람들>

 

 

 

File:Jean-François Millet (II) - Trussing Hay - WGA15689.jpg - Wikimedia Commons

From Wikimedia Commons, the free media repository

commons.wikimedia.org

 


신성한 노동, 그 위태로운 진실

그림 속엔 세 명의 인물이 있다.
왼편에는 갈퀴를 든 여인이 건초를 긁어모으고 있고,
오른편에는 두 명의 남성이 건초 더미를 감싸며 묶고 있다.
세 사람 모두 몸의 무게를 땅에 실은 채, 말없이 일에 집중하고 있다.
그 자세는 마치 대지와 한 덩어리가 된 것처럼 보인다.

구도는 어디선가 익숙하다.
《이삭 줍는 여인들》처럼, 낮게 깔린 지평선, 무겁게 내려앉은 햇살,
그리고 한 점 그늘 없는 벌판 위의 사람들.
하지만 여기에 담긴 감정은 다르다.

이들은 자연 속의 낭만적인 존재가 아니다.
밀레는 그들을 현실에 두고, 신성함이라는 새로운 시선으로 감싸 안는다.


밀레가 그린 위험한 진실

밀레는 농민을 찬미하면서도, 낭만화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땀과 피로 얼룩진 ‘현실’에서 붓을 들었다.
《건초 묶는 사람들》에서 이들의 노동은 고되고, 묵직하다.

이들이 끌어안고 묶는 건초는 어쩌면 신의 선물일지도 모르지만,
그 혜택은 이들에게 고스란히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밀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존엄한 존재로 그려낸다.
하늘에서 흘러내린 빛은 여인의 앞섶과 남성의 어깨를 비추며,
고단한 일상에 작은 위로를 내린다.
그건 현실 속의 은총이자, 노동의 숭고함을 비추는 은유이다.


땀은 신의 언어일지도

이 그림을 보다 보니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혹시 밀레는 이들의 뒷모습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신이 내린 선물은, 결코 혼자 오지 않는다.
그것을 일구는 손이 있어야, 그 선물은 비로소 세상에 도달한다.”

건초는 덧없다. 금세 시들고, 썩고, 사라진다.
하지만 그것을 묶는 손, 쌓는 어깨, 꿰매는 노동은 절대 가볍지 않다.

《건초 묶는 사람들》은 단지 전원의 풍경을 그리는 그림이 아니라,
밀레의 시대를 향한 조용한 질문인 것 같다. 
"이들이 없다면, 축복은 어디서 오는가?"

 

덧없는 것일수록, 인간의 손은 더 정성스럽다. 

 

→ 흙 위의 기도, 밀레와 땅의 사람들(8) 마지막 회차 예고   

→ <한낮의 휴식> 고요속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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